[여운종의 철학단상(哲學短想)] 성탄특집5. 인간이 높이려는 하느님과 스스로 낮아지려는 하느님
성탄특집 철학 이야기, 오늘은 어제에 이어 [높음과 넓음]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왕, 귀족, 평민, 노예.
왕, 양반, 평민, 천민.
불과 일이백 년 전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었습니다. 그 위에 가장 높은 것은 신 또는 하느님이라 불리는 영적 존재입니다. 왕은 그 신의 대리자입니다. 왕은 신을 대신해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왕에 대한 모든 신화나 설화는 하늘과 신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중국 황제의 다른 표현은 천자(天子)이고, 우리나라 단군신화도 예외는 아닙니다. 귀족은 신의 선택을 받은 가문입니다. 그래서 지배 계층은 되도록 신의 위치를 높이고자 합니다. 그래야 신의 대리자인 왕과 선택된 가문인 귀족들의 위치도 더 특별해지고 더 높아집니다. 대부분의 민족들은 그들이 하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신화를 가지고 있고 신화는 그 민족의 문화와 전통이 됩니다. 왕과 귀족의 문화가 인류 문명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지금도 많은 국가에서는 상징적이든, 실제적 권한을 가지고 있든 왕이 국가를 대표하는 나라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옛 유대인들은 그들의 하느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표현하는 단어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감히 정확하게 표현을 못 하고 자음만의 이니셜로 표기하였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부르는 구약의 하느님의 이름이 달리 표현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음만 있는데 모음을 적당히 넣어보니 `여호와`가 되기도, `야훼`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왕도 아니고 평민의 아들로 인간 세상에 도래했습니다. 성경은 동방박사 등의 이야기를 통해 아기 예수를 왕의 강림으로 이야기하려 합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족보도 만들고,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살던 부모가 느닷없이 유다 지방인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았다고 전해줍니다. 우리나라를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연변 지방의 조선족 아이가 충청도 계룡산에서 태어난 것이지요. 왕의 가문과 왕의 고향에 예수님의 탄생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천사의 방문과 성령의 잉태는 하느님의 거룩한 표징이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십자가에 붙었던 명패도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왕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와 아주 동떨어진 특별하고 거룩하며 지극히 높은 분이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왕을 넘어 하느님의 아들, 그리고 하느님과 동격으로 높이높이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지칭했던 표현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당시 유대인들은 감히 두려워 입에 올리지도 못했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칩니다.
성탄의 철학적 의미는 [인간이 높이려는 하느님]과 [스스로 낮아지려는 하느님]의 숨은 뜻을 찾는 일입니다. 그것의 해답은 내일 이야기할 [넓음]입니다.
당신의 하느님은 당신과 멀리 떨어진 높은 곳에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마음속에 당신과 함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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