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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종의 철학단상(哲學短想)] 성탄특집4. 높음과 넓음

[여운종의 철학단상(哲學短想)] 성탄특집3.  높음과 넓음

성탄절 특집 철학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데요, 오늘의 주제는 [높음과 넓음] 그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느님을 표현할 때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으로 표현합니다. 저는 지극히 넓으신 하느님으로 표현한답니다. 왜 그럴까요?

높다는 것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어떤 기준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을 `높다`라고 표현합니다.  과학적으로는 중력과 연관된 듯합니다. 중력 기준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더 높은 것입니다. 백두산이 한라산보다 더 높습니다. 지구에서 보면 태양이 달 보다 더 높다고 할 수 있겠지요? 지구면을 기준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북극성이 태양보다 더 높이 있는 것일까요?

사회통념적으로는 지위가 더 위에 있는 것을 높다고 합니다. 내가 과장이면 부장, 사장은 나보다 높은 것이고, 대리, 주임은 나보다 낮은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권력의 위치에 따라 계급 또는 등급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가장 높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난 정권의 촛불 대통령은 그리 보이진 않았지요? 나라를 말아 먹고 쫓겨난 대통령에겐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불러 주던 대로 받아쓰던 언론사 기자들이 지난  문 대통령에겐 물고 뜯고 대들며 엉기는 모습이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다시 검사 출신의 대통령에겐 꼼짝도 못 하는 기레기들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이 못난 정권을 세우는데 1등 공신이 바로 기레기들이었죠? 내년 성탄절에는 이 어둠이 세력이 대한민국에서 영원히 사라져주기를 성탄절 아침에 또한 간절하게 기도드립니다.

스승이 제자보다 높고, 부모가 자녀보다 높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이야기할 때도 말씀드렸듯이 우주에서 보면 지구와 그 안의 인류는 그냥 하나의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티끌의 이곳저곳에서 내가 더 높으니, 내가 얼마나 더 가졌느니 혹은 내가 얼마를 더 살았느니 하는 것은 정말 하등의 하찮은 일이겠지요. 우주의 눈으로 본 것이 하느님의 눈이 될 것입니다.

높고 낮음은 중력과 인간의 편견이 가지는 오류입니다. 우주의 눈에는 높음과 낮음이 아니라 넓음과 좁음으로 구분합니다. 인간의 권력 또한 그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권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권한의 넓음과 좁음으로 세상이 진화할 때 인류의 구원, 예수님께서 주창하시는 하느님의 나라가 비로소 도래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권력 중심 사회에서 역할 분담 사회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저의 철학 이야기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4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인류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진보이기도 합니다. 자본과 권력 중심의 세상을 타파하지 못한 4차 산업혁명은 서민들에게는 헬 조선이라 표현되는 지옥의 그것일 것입니다.

어느덧 2024년의 마지막 수요일입니다. 다음 수요일은 2025년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있을 것입니다. 세월 참 빠릅니다. 성탄절부터 31일까지 일곱 날이 매년 그 해의 마지막 요일이 됩니다. 성탄절. 높이 계시던 하느님의 아들이 낮은 인간으로 그것도 평민의 아들로 내려왔을까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생각해 보시는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