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바다의 철학단상 (哲學短想)] 2월 2일 초를 축성하는 봉헌의 날과 사랑의 참 의미, 이타의 사랑
[하늘바다의 철학단상 (哲學短想)] 2월 2일 초를 축성하는 봉헌의 날과 사랑의 참 의미, 이타의 사랑
2월 2일인 오늘, 가톨릭교회에서는 1년간 성당이나 가정에서 미사 때나 기도드릴 때 쓰는 초를 축성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초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초가 자신을 희생하여 주위를 밝히듯, 예수께서도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구원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자비, 유교에서는 인의예지,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랑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사랑, 즉 이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스스로를 위한 죽음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희생으로 보는 것이고,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루카 10,27)`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철학자의 눈으로 보는 현대 교회의 모습은 자기의 잘못이나 나약함 심지어 범죄를 변명하며 변호하고, 하느님의 용서나 자비를 악용하여 자기만족을 이루는 위장막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교회에서조차 이타의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이기적 사랑만이 존재합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물질과 돈을 섬기는 교회의 첨탑이 바벨탑처럼 느껴질 때 인류의 큰 스승이신 예수의 통곡은 가난한 철학자의 폐부를 찌릅니다.
중국의 예수라 불리는 묵자는 이타의 사랑을 [겸애 교리(兼愛交利)]의 사자성어로 축약합니다.
겸애란.
視人之國若視其國 (시인기국약시기국)
남의 나라 보기를 내 나라 같이 하고
視人之家若視其家 (시인기가약시기가)
남의 집 보기를 내 집 같이 하고
視人之身若視其身 (시인기신약시기신)
남의 몸 보기를 제 몸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리(交利). 이익이 생기면 혼자 많이 가지려 하지 말고 정당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나눔은 사랑을 표현하는 몇 가지 요소 중 하나입니다. 나누지 않으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원을 가족같이 대한다는 회사가 이익은 몇몇 주주와 경영자만 독식한다면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라 하면서 육체노동자, 아르바이트생들은 최저 임금도 못 주겠다고 하는 것도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상위 소수 계층이 전체 부의 대부분을 독차지하고 있다면 그 역시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은 그가 부자라서가 아니라 그가 부를 축적하면서 마땅히 나누었어야 할 것을 나누지 않고 혼자 독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에서는 그것은 죄(罪)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물질문명을 어마어마하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정신문명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인류의 물질문명은 오히려 인류를 멸망시키는 최악의 도구가 되고 무기 될 것입니다.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뒤바꿀 4차 산업혁명의 시대. 종교가 인류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침잠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을 지향하는 종교가 구시대의 유물로 사그라 들 것이 아니라, 철학과 함께 인류 정신문명의 발전에 한 축을 담당해 주기를 여전히 기대하고 고대합니다. 그리하여 종교와 과학과 철학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어울려 평화와 풍요를 이루고, 생명의 연대를 깨달아 모든 지구 생명들이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꾸어봅니다.
종교가 인류 문명의 땅을 다지고
과학이 그 위에 멋진 집을 지었습니다.
그 집이 거대한 감옥이 될 지
신나는 놀이공원이 될 지를 결정하는 것은
철학의 몫입니다.
